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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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축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비극이 아니라 승리임을 보여주십니다. 그의 죽으심은 모든 죄에 대한 죽으심이며, 그의 부활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첫 열매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악의 세력은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어 두지 못했습니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부활로 아름다운 결말을 맞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딸 엘리스 공주에게 네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이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맸습니다. 그 당시 디프테리아는 치사율이 매우 높은 질병이었습니다. 의사는 엘리스공주에게 당부했습니다. “당분간 아들과 떨어져 지내야 합니다. 만약 아들과 함께 지내면 공주님에게 금방 전염됩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비극을 당할 수도 있어요.” 엘리스 공주는 아들의 고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하루는 아들이 원망스런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왜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나요. 내게 입을 맞춰줘요.” 엘리스는 아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단숨에 아들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미안하다 아들아, 엄마는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몇 달 후 엘리스공주와 아들은 디프테리아로 사망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죽음을 알면서도 자녀를 위해 불속에 뛰어듭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제자들의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아침으로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세계역사의 흐름은 이제 새로운 방향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인 부활 이야기의 시작은 예수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은 단지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예의로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천사 둘을 만나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자의 증언은 법정에서 효력을 갖지 못함. 세계역사의 흐름을 바꾼 그 부활의 소식은 보잘것없는 여자들에 의해 처음 선포된 것입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이 부분을 ‘비 유사성의 법칙’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그 당시 세계의 신학을 이끌고 있었던 많은 독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후대의 저자들이 꾸며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부활의 신앙을 갖자는 좋은 의도로 초대 교회가 꾸며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초대교회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이런 식으로 꾸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초대교회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복음서의 내용은 그 당시의 전반적인 문화적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저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꾸며내었다면 여인들이 맨 처음 부활을 목격했다고 꾸며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여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전혀 가치가 없는 증언이었고, 도리어 불리하게까지 적용되는 증언이었습니다. 그 당시 불리하게 적용되는 증언을 초대교회 저자들이 꾸며내어서 적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의 보도는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의 부활의 보도는 사실임이 학문적으로도 증명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부활의 이야기를 허튼 소리라고 여깁니다. 부활이란 인간의 상식으로는 기대할 수도 없고,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자들조차도 허튼 소리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부활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 실제로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변화 그리고 교회의 탄생과 급속한 성장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부활의 역사성을 믿는 믿음, 즉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는 그 신앙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부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곧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 분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신앙이 부활신앙입니다. 그 믿음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를 위한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핵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것은 우리를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기에 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롬 6:4-5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부활을 예수님의 전 생애와 그 분의 말씀과 십자가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의 나 자신과 관련하여 이해해야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나를 위한 부활입니다.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체험 안에서만 참된 부활신앙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부활 신앙 안에서 우리 주님의 부활 가운데에서 무조건 나를 용납해주시고 나에게 새 생명과 삶을 주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확인하고 경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활절은 축제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주일 예배드리는 것도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모여 드리는 축제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바로 우리를 위해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무조건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새로운 삶의 용기와 능력을 주시고자 하는 부활의 소식을 마음속 깊이 받아 들여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 너머에 까지 이상과 소망을 품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의 부활이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 사막은 불덩어리같이 뜨거웠고 갈 길은 멀었습니다. 뜨거운 햇빛과 목마름을 견디지 못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더 이상 못가겠어요. 목이 마르고 지쳐서 죽겠어요.” 아버지는 “얘야, 그렇지만 끝까지 가보아야지 않겠니? 얼마 안가면 마을을 발견할 거야.” 아버지는 아들을 다독거렸지만 아들은 절망 속에서 무덤을 보고 “저것 보세요, 아버지! 저 사람도 지쳐서 죽었어요.” 아들은 낙심해 고개를 푹 수그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니란다.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곧 희망이 있는 거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곳에는 무덤도 없으니까.” 과연 두 사람은 가까운 곳에서 마을을 발견하였고, 계속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현실 속에서 종종 악이 더 강함을 체험합니다. 착하게 살며 정직하게 사는 것은 남에게 이용거리만 될 뿐이라고 느낍니다. 역시 돈이 최고라는 사람들은 언제나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현실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그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감격과 힘이 솟습니다. 악의 승리는 일시적이요, 하나님은 진리와 의와 사랑 편을 드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부활은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아름답게 비추어줍니다. 십자가야말로 가장 저주스러운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 없인 부활이 없습니다. 때로 재앙으로 생각하고 낙심, 절망하나 부활을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고난은 값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부활에 이를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고난 속에서도 천국의 소망을 심어주는 사람입니다. 독일 전역이 30년간의 종교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때 눈물의 기도를 드리던 한 목사님은 핍박받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 전역에 흑사병으로 1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독일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습니다. 목사 부부는 어느 날 중병을 앓고 있는 한 신자의 가정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목사 부부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교회와 집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이 서로 껴안은 채 죽어 있는 아들의 시체를 이들 부부는 부둥켜안고 울면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주께 드리니/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