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권력을 바로잡을 권리
본문
사람들이 정당성을 잃은 국가권력에 맞서 스스로 빼앗긴 인권을 되찾거나 부인당한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일어서는 것은 당연한 권리 행사입니다. 물론 저항 혹은 불복종의 형태와 수준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저항과 불복봉의 대상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법 조항 하나가 문제일 수도 있고, 책임을 지닌 공직자 한 사람이 문제일 수도 있고, 정책 방향 하나가 문제일 수도 있고, 정권 전체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권리를 우리는 ‘저항권’이라고 부릅니다. 인권은 근대시민혁명과 더불어 등장했습니다. 불의한 봉건체제에 맞서 저항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인권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저항성은 인권의 탄생 비결이자 인권을 지속적으로 밀어가는 힘이 되는 원칙입니다. 우리 헌법도 부당한 정권에 맞서 떨쳐 일어났던 4.19 혁명의 저항정신을 헌법 정신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항은 권리이면서 권리를 얻어내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에 항거하며 흑인들의 시민권을 얻어내기 위해 흑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백인들이 수많은 집회와 행진을 열었습니다. 현행법 위반으로 수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히곤 했지요. 이 투쟁을 이끈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왜 협상을 시도하지 않고 연좌데모를 하고 직접행동을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위기와 긴장감을 조장시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고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즉 사회의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직접행동이 추구하는 바입니다.”라고 말이지요. 더 높은 양심의 법, 인권의 법을 따르면서 현실의 법이 가진 폭력성을 고발하는 저항이 없는 한, 인권 보장은커녕 협상의 기회조차도 오지 않는다는 통찰이 엿보입니다.
저항권은 불복종할 권리, 인권을 옹호할 권리라고도 얘기될 수 있습니다. 이 저항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인권의 무대로부터 배제됐던 사람들이 인권의 주체로 인정받는 일도, 시대에 따라 새롭게 요구되는 인권을 얻어내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인권이 등장했던 근대 초기, 인권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을 확보하는 데만도 2백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고, 20세기 초반에서야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하는 나라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도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국제인권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정보사회가 발전하면서부터는 정보의 집적이나 유출로 인한 피해가 급증함에 따라 ‘정보인권’이라는 새로운 권리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권리나 새로운 이름의 권리가 새롭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권의 역사성’이라고 부릅니다. 인권을 아무리 현재 상태에 붙들어 매고 고정시켜 두려 해도 인권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확장을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권을 억압하는 사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인권의 역동성과 역사성을 만들어온 것이니까요.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이 ‘법에 의한 통치’(the rule of the law)에 의해 보장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권력자의 기분이나 자의적 기준에 따라 인권 보장의 잣대가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의지, 인권이 어떻게 보장되는지가 명확하게 약속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때의 법은 현실에 존재하는 법, 법전에 기록된 법(실정법)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실정법이 더 큰 양심의 법, 인권의 법을 위반하고 있거나 그에 못 미친다면 실정법보다 ‘더 높은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의 지배’의 참뜻입니다. 법의 지배와 준법의 의미가 달라지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1994년 영국의 여성 세 명은 인도네시아로 수출될 전투기에 몰래 숨어 들어가 준비해간 가정용 망치로 무기 발사 장치를 망가뜨렸습니다. 그 전투기가 동티모르라는 나라를 불법 점령하고 있는 인도네시아로 팔려간다면, 무고한 동티모르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건 물론이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쓰일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전투기를 망가뜨린 행위는 ‘파괴’ 행위가 아니냐는 비난을 받은 그 여성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무기를 부수는 행위는 파괴가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여성들은 결국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실정법은 어겼을지언정 그보다 더 높은 양심의 법, 인간의 법에는 충실했다는 것을 법원조차도 인정한 셈입니다. 이것이 실정법에 보장된 만큼만 인권이라고 수용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법이 있기 전에 사람이 있고, 실정법이 있기 전에 인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의 틀 안에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인권의 틀 안에서 법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