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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리더십

월드미션 기자
작성일 2021-04-2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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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에 장릉(長陵)이다. 인조의 무덤이다. 

인조는 조선 제 16대 왕이다. 할아버지는 선조요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으로 이름은 종, 자는 화백, 호는 송장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1623년 서인들이 일으킨 정변에 힙입어 광해군을 왕위에서 내쫓고 옹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했다. 반정공신들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왕권을 강하게 내세우지 못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찾았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박해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한 반인륜적인 행위와 중국에 후금(後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로, 반정은 이러한 광해군의 폭정을 중단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인 것으로 합리화되었다. 따라서 광해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 수십 명을 처형했다.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士林)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奇自獻)·유몽인(柳夢寅) 등의 역모가 있었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黃玹)·이유림(李有林) 등의 역모가 있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것이 이괄의 난)이다.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都監大將) 이수일(李守一)이 내응(內應)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인조는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이 있었다. 인조정권은 광해군 때의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반인륜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실시했다.

이 무렵 1627년 중국 후금(後金)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정묘호란이다.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36년 후금(後金)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인조정권은 이를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로 보낸 뒤,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따.,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낙당(洛黨)과 원당(原黨), 산당(山黨),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경기군(京畿軍)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摠戎軍)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제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은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임성아 목사

·수원성민교회 담임 ·본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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