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들에게 한국이 복음을 받아들여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25년간 러시아 선교에 매진한 이재영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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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복음을 전하기 쉬운 국가가 있는 반면, 이슬람 지역이나 공산권 지역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다. 조선 선교초기도 그런 국가 중 하나였다. 유교 국가에다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강한 곳. 초기 서양 선교사들은 이런 조선에 들어와서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유익한 종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공산권에서 25년간 사역한 이재영 선교사도 같은 원리로 접근했다. 공산권이고 소련이 붕괴한 이후 낙후된 지역에서 이재영 선교사가 전달한 것은 복음과 함께 기독교가 유익한 종교이며 가장 헌신적인 종교임을 가르쳤다.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재영 선교사는 유진벨 선교사가 개척한 영광읍교회에서 첫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서 상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고 중학교 1학년 당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서원기도를 드렸다.
“당시에 전도사님께서 고등학생 선배들에게 ‘대학 진학이 어려우면 신학교 가면 되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연히 이해도 안가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그런 목사가 아니라 진실된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가겠다고 다짐하고 서원하게 됐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형이 가져온 성경통신교육원 교재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극동방송 전도부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극동방송이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할 당시였는데 당시 극동방송에서 하던 일이 러시아어 성경과 중국어 성경을 읽어주는 일이었다. 이재영 선교사가 당시 했던 일은 중국에서 온 편지를 읽어주는 것이었는데 당시 중국에서 온 편지의 내용이 “성경을 들었어도 그 뜻을 모르니 누군가 와서 가르쳐 주면 좋겠다”는 편지였다.
이재영 선교사는 이런 편지를 읽으면서 감동이 되어 ‘제가 가겠습니다’라는 서원기도를 했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선교사를 꿈꿔왔는데 당시에는 중국과 한국이 국교를 맺기 전이어서 도무지 선교사로 갈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신학교를 졸업한 이재영 선교사는 1985년 경기도 부천시에 교회를 개척하고 극동방송에서 방송설교, 어린이 설교 등을 하면서 선교에 대해 가르치는 일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총회에서 필리핀 목회자 교육을 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면서 필리핀총회신학교에 갈 수 있는 목회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봤고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던 이재영 선교사가 자진해서 필리핀으로 떠났다. 그것이 이재영 선교사의 선교의 시작이었다.
“그 후 3개월에 한번씩 필리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필리핀을 가서 필리핀 목회자들을 교육하기 시작했고 필리핀 총회신학교 측에서 4년 동안만 정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에 성도님들의 양해를 구하고 필리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1996년의 일이었다. 그렇게 필리핀 선교사로 신학도 가르치고 청소년 전도도 하고 복음적인 영화를 가지고 지역사회를 돌면서 선교 사역도 감당하면서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역을 마무리해 갈 때쯤 ‘러시아로 가서 선교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다. 백석 총회를 통해 러시아 북방 기술대학으로 파송 받게 됐는데, 예상치 못한 반대에 막혀 기도하던 중 북카프카즈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북방기술대학 파송이 어려워지면서 고민하고 있었을 때 한 장로님과 권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분들이 러시아 선교를 하는 분들이었고 이 분들을 따라 러시아로 간 곳이 북카프카즈 지역이었습니다.”
북카프카즈 지역은 그곳은 당시(2000년 경) 전쟁이 한창인 체첸공화국으로 모스코바에서도 비행기로 2시간이 걸리는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600명 정도가 집회에 모였고 그 중 400여 명은 고려인이었다. 이재영 선교사는 그 때 눈이 번쩍 띄어졌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러시아로 가라고 할 실 때 하신 말씀이 ‘네 민족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이셨는데 북카프카즈 지역에 갈 때까지 이해를 못하다가 이 곳에서 고려인들을 만나면서 그 말씀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북프카스지역은 러시아, 즉 공산권이면서도 전통 무슬림 공동체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카프카스산맥을 중심으로 체첸과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 러시아 연방 공화국들이 자리하고 있고, 산맥 아래쪽에는 터키와 이란 등 중동 국가들이 위치해 있다. 지역적 특성상 카프카스 국가들은 ‘이슬람’에 속한다.
당연히 선교 자체가 어려운 지역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을 만난 이재영 선교사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총회에 확인을 했고 그렇게 2000년도 러시아 북카프카즈로 향하게 됐다.
처음에는 고려인 위주로 사역을 시작했다. 고려인들은 시베리아 강제 이주열차를 타고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에 이주를 했는데 당시 체첸 전쟁의 영향으로 집을 잃고 어려움이 있는 고려인들이 북카프카즈 지역으로 많은 이주를 했다고 전한다.
“선교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불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기독교를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에게 한 말이 1500년동안 불교를 믿어왔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아침 인사로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배고픔의 대명사로 인사를 해야 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이 조상 대대로 어려움을 겪고 힘들게 살아온 반면 기독교를 받아들인 대한민국은 이제 경제적으로 성장해온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예수를 믿으면 삶이 바뀔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려인들에게 한글 교육과 전통 문화행사를 치르며 자연스럽게 전도의 물고를 트고, 고려인들의 단합에 힘쓰기 시작했다. 사역하는 교회가 성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 복음을 전하면서 조금씩 지역사회에 이재영 선교사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런데 2016년 러시아 정부가 ‘야로보이법’이라 불리는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면서 다시 어려움이 다가왔다. ‘야로보이법’으로 인해 정부에 등록되지 않는 교회는 모두 불법 집회로 간주되어 강제 해산하는 아픔을 겪게 되는 데 그 가운데에서 이재영 선교사는 이슬람 지역인 러시아 북 카프카즈의 시베리 오세티아 공화국, 까발진 발카리 공화국 등에 교회를 개척하고, 러시아에 속한 스타브로폴 주에서도 두 개의 교회를 개척해 섬기기도 했다.
이재영 선교사는 평생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도 힘든 이 지역에 8개 교회를 개척한다.
“북카프카스 선교가 중요한 것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역적 위치로 인해서 복음이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 신앙으로 이슬람이 유지되고 있어, 복음의 수용도도 높은 편입니다.”
이재영 선교사가 한국문화를 통한 교회개척과 청소년 사역을 하면서 만난 것이 ‘마약 문제’였다. 청년 인구가 많은 체첸 등 카프카스지역은 구 소련의 몰락 후 공장이 파괴되고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청년들이 희망을 잃고 마약과 향락에 빠져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고려인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와서 손주가 마약에 중독이 되어 있는데 예수를 믿으면 고쳐진다고 하는데 진짜냐며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 마약도 고칠 수 있다고 했고 그렇게 그 아이가 신앙생활을 하게 마약을 끊게 됐고 그 소문이 나면서 마약하는 청년들이 찾아오게 됐습니다.”
이 선교사는 그 청년들에게 하루에 성경을 3장을 읽고 3시간을 기도하고 시내 청소를 시키면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마약의 금단 증상을 겪지 않으면서 마약을 중단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마약중독에서 벗어나 목회자가 된 청년도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러시아에서 정부와 주지사, 시장 등 여러 기관에서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지금까지 받은 표창만 해도 30여개에 이른다.
이재영 선교사는 코로나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이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러시아로 못간 채 현지에 있는 사역자들과 교류하며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해외 있으나 국내에 있으나 선교사는 선교사입니다. 토요일이나 주일에 서울 역사문화공원을 가보니 거기에 러시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산에서 왔다고 하는데 교회를 다닌다고 말해서 안산에서 다시 만남을 가지니 안산에는 러시아어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6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산의 선부동 인근에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 곳에는 고려인만 약 1200여 명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서 이재영 선교사는 그들을 돕겠다고 또 손을 뻗었다. 현재는 러시아어로 예배드리는 2곳의 교회를 돕고 있다.
이재영 선교사가 25년간 러시아 선교를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들이 한국의 발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고려인들을 초대해서 한국의 발전상을 알려주고 자긍심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 질 것입니다.”
최근 들어 고려인들이 한국 경제가 발전되어 있다는 사실에 한국에 돈을 벌러 나오고 있지만 그들이 한국에 왔을 때 복음을 잘 전해서 현지에서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 이 선교사의 바램이다.
또 하나의 바람은 선교지에서 선교사 자녀들의 역할에 대한 기대도 있다.
“조선 초기 서양 선교사들이 성공한 케이스는 그 선교사들의 자녀들까지 3~4대에 이르러 사역을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의 경우는 80년대 중반부터 선교지로 나갔는데 1세대만 선교하다가 철수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해온 선교사역을 이을 수 있다면 보다 좋은 선교환경을 만들 수 있을을 것입니다.”
한국에 와 있지만 이재영 선교사의 러시아 선교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 러시아로 향할 날을 기약하며 한국교회가 더욱 러시아, 고려인을 향한 복음의 열정이 많아지길 이재영 선교사는 기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