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은 봉사죠”
인생을 정리할 시간에 다시 뛰는 선화장로교회 송영진 목사
본문
목회자 이중직은 그동안 한국교회의 오래된 딜레마 중 하나였다. 목사는 목회에만 전념해야지 다른 ‘부업’(副業)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목회만으로는 생계가 불가능한 목사들이 있으니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했듯이 목사도 부업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 나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전반적으로는 목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것은 오래되고 강력한 통념이다. 이를 신앙과 연계해서 해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목회자 이중직은 목회를 잘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선화장로교회 송영진 목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목회자가 목회에 전념하는 것이 나쁘지 않지만 목회의 개념이 꼭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송영진 목사는 지난 1992년 충성교회를 개척했고 30년 가까이 목회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전 지역의 대표적인 목회자 중 한명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송영진 목사는 지난 1994년 대전지방철도청 공문원으로 정년퇴직한 공직 퇴직자 중 한명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목회활동을 이어간 전형적인 이중직 목회자다. 그럼에도 송영진 목사는 이중직이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목회활동을 하면서 ‘사례비’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중직이라는 지탄을 받는 이유는 사실 ‘사례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례비를 안받고 바울이나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면 지탄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송영진 목사가 다만 ‘사례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이중직 목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충청북도 괴산 청안이라는 산골을 고향으로 둔 송영진 목사는 유아세례를 받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영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송 목사는 담당 목회자가 신학을 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고등학교 졸업 후 도망치듯 대전으로 내려워 대전지방철도청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당시 송 목사는 목회자가 되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인 직장 선교였다. 목회자가 되지 않아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신앙을 세워가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직장선교를 진행하면서 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당시 대전 목동에 있던 침신대에서 수업을 들었고 더 깊은 신학을 하기 위해 한성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송 목사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것은 또 다른 개기가 있었다. 송 목사가 대전철도청에 근무하고 있는 가운데 성탄절을 앞두고 출근하는 길에 운전하는 차량이 수십리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송 목사가 몰던 차량은 완전히 부서졌는데 송 목사는 다친 곳이 없었고 다부서진 차량에서 카세트테이프만 멀쩡하게 돌아가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들려진 찬양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곡이었고 그 후 하나님의 부르심에 뜻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안수를 받고 처음 개척한 교회가 ‘충성교회’였다.
충성교회에서 12년간 목회를 한 송 목사는 다시 대전장로교회를 14년 간 목회를 했고 지금은 선화장로교회를 12년 째 사역하고 있다.
이런 사역 가운데 송 목사는 여전히 공직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공직자의 신분을 유지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례비’가 아니었다.
특수 목회, 직장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송 목사가 목회자의 신분으로 일터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일터에 스스로 남았다.
“조직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조직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날 수 있는 이방인을 만나려는 욕심으로 일터라는 조직에 들어가 있었던 거죠.”
은퇴를 하고 나서도 대전광역시 5대 명예시장을 맏아 수고 했으며 명예시장 직무를 마친 뒤에는 대한적십자사에 대전시 대표로 들어가서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예시장을 맡았을 때도 국장 한명을 전도해서 세례를 받게 하는 일도 있었다.
교회라는 건물의 안에서만 목회하는 것은 송 목사의 열정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35년 간 직장선교사역을 진행해오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대전에 있는 22개 지하철 역에 있는 공직자들의 예배를 집례하고 경찰복음화를 위해 경복으로 25년 간이나 활동하면서 경찰관 출신 목회자를 6명 배출하기도 하는 등 그가 있는 곳은 어디든 교회가 됐다.
송영진 목사가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죽음을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송 목사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뻔 한 일 뿐 아니라 송 목사가 스스로가 위암 수술만 5번을 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경험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전우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죽음 직전에서 살아남는 경험도 하게 되면서 물질을 초월하는 감사를 얻게 됐다는 것이 송 목사의 말이다.
“물질을 원하면 질고는 받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중직에 대해 왈부왈가 하는 분들이 있는데 직업을 통해서 주의 영광이 드러나면 된다고 봅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지탄의 대상이 될 수는 없지요.”
그리고 송영진 목사가 최근 집중하는 일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는 매일 오후 2시 호국영령 합동안장식의 집례다. 호국영령합동안장식은 기독교를 비롯해서 가톨릭, 불교, 원불교가 동시에 집례를 하는데 과거 몇 년은 안장식 자체에 질서가 없었다.
그리고 5년 전 국립현충원이 대전기독교연합회에 기독교 집례자를 요청했고 송영진 목사 등 몇 명의 목회자들이 추천되어 지금까지 집례를 담당하게 되면서 안정된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이기도 한 송영진 목사는 이 일이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한다.
“나중에 제가 묻힐 자리가 바로 이곳이기도 하고 월남전 전우가 한명씩 들어올 때마다 유족자들과 같이 오열을 합니다. 제가 이 곳에 함께 유족자들을 위로하는 것이 바로 저의 사명이 되었지요.”
송영진 목사의 또 하나의 관심은 대전 지역에 있는 이단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다.
송영진 목사는 지난 3월 13일 대전시기독교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5대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이단 대책에 더욱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대전은 이상하게도 종교의 메카처럼 되어 있습니다. 신천지, 구원파, 대순진리회, 안상홍 등 이단들이 엄청난 활동을 하고 있는 지역이지요. 이에 대한 대처가 어느 지역보다 시급한 상황입니다.”
송 목사는 이대위원장 3년 동안 대전 지역에 있는 이단대책 전문가들을 정예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힌다. 특히 각 교단에 있는 이단 전문가들을 대전지역으로 파송해 대전지역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싸워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대전 지역에 이단 세력이 매우 큰 만큼 교회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그 일을 하는데 전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다른 목회자 같으면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시기에 송영진 목사는 다시 한발자국 나서고자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나이는 상관없다는 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