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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섬김의 목회 실천가 안영로 목사 별세
제90회 총회장, 광주서남교회 원로목사 향년 90세로 소천

월드미션 기자
작성일 2026-05-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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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90회(2005년) 총회장과 본지 이사장을 역임한 안영로 목사가 지난 5월 6일 오전 9시 30분경 광주광역시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향년 90세였다. 광주서남교회 원로목사로 재직한 안 목사는 60년 이상의 목회 사역을 통해 ‘섬김의 목회’를 실천한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한국교회 발전에 헌신했다.

1936년 11월 16일 전남 함평에서 출생한 안 목사는 호남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하워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D.Min.), 루이지애나침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한남대학교, 호남신학대학교 등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2년 10월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안 목사는 62년부터 목회를 시작해 45년 이상의 목회 여정을 걸었다.

안 목사의 목회 경력은 정력적이고 다채로웠다. 신학교 전도사 시절 전남 함평 해보제일교회를 개척했으며, 이후 광주 유덕교회에 부임해 10년간 목회했다. 그 후 광주 수피아여자고등학교 교목실장으로 12년 5개월을 근무하면서 양림교회, 광천교회, 방림교회의 임시 당회장을 역임했다. 이는 안 목사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이 문제 교회의 회복을 돕는 데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광주서남교회에 위임목사로 부임한 안 목사는 18년간 교회를 이끈 후 은퇴했다. 부임 당시 장년 출석 성도가 500여 명에 불과했던 서남교회는 안 목사의 ‘섬김의 목회’ 철학 아래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은퇴 당시 장년 출석 성도는 1,500여 명을 넘어섰으며, 재적 4,000여 명, 장년과 교회학교를 포함해 2,000여 명의 출석 성도를 보유한 광주시 10대 교회로 성장했다. 교회의 표어인 ‘오직 예수 세계 선교’는 안 목사의 목회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안 목사가 ‘섬김의 목회’를 평생의 목회철학으로 삼게 된 계기는 1963년 신학교 전도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순 시골마을에서 한 장로를 만난 안 목사는 처음에는 마당을 쓰는 일부터 시작했다. 밤중에 장로가 옷을 긁으며 고통해하자, 안 목사는 조용히 일어나 장로에게 옷을 벗어달라며 옷에 붙은 이를 잡아주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자신이 작은 섬김을 실천한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장로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고, 이 경험이 안 목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섬기는 목회’를 다짐하게 했다.

안 목사는 교회 목회뿐 아니라 교단과 사회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전남노회장과 세계농촌선교센터 대표, 광주기독병원 이사장, 호남기독학원 이사장, 월드미션신문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CTS 공동대표이사와 한국기독공보 이사장으로도 섬겼다. 또한 예장 300만 성도운동본부 본부장, 사학수호운동본부 본부장, 한국기도운동본부 상임고문, 라이즈업코리아 운동본부 대표회장 등 다양한 사역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 발전에 헌신했다.

안 목사는 선교에도 깊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남미 볼리비아에 에덴선교센터를 설립해 교육과 복지 선교를 전개했다. 에덴선교센터에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신학교, 그리고 내과·외과·소아과·치과 진료 과목을 갖춘 병원이 설립되어 현지 주민들의 영적, 육체적 필요를 섬겼다. 또한 남태평양 바누아투공화국의 수도 빌라에 간호대학을 설립해 의료 선교에도 기여했다.

안 목사는 한국교회의 선교 유산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도 열정을 쏟았다. 저서로는 미국 선교사 유화례의 헌신을 기린 ‘메마른 땅에 단비가 되어’, 호남지역 100년 선교 역사를 기록한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한국교회 선구자 언더우드의 생애를 조명한 ‘한국교회의 선구자 언더우드’, 이외에도 ‘하나님이 이끄신 땅 바누아투’,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총회장 안영로 논설집’ 등이 있다. 특히 언더우드를 기억해 쓴 ‘한국교회의 선구자 언더우드’는 지난 2003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청소년도서에 선정되었으며 한국 크리스천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유화례 선교사와의 만남은 안 목사의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청년 시절 영광 염산교회 하계수련회에서 연로하고 몸이 약했던 유화례 선교사를 업고 배까지 모셨던 안 목사는 선교사의 권유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유화례 선교사는 이 젊은 청년의 비전을 보고 5년간 학비를 지원했으며, 이는 안 목사로 하여금 평생 선교사 정신으로 살아가게 했다.

안 목사는 평생 설교를 통해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안 목사는 “현대인들은 상처가 많다”며 “성도에게 마음과 영혼의 치료가 되도록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설교에 담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신앙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 십계명 준수도 함께 강조했다.

서남교회는 안 목사의 섬김의 리더십을 구현하는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교회 재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22개 위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여 평신도 중심의 자율적 섬김 문화를 정착시켰다. 교인들은 “서남교회에 가면 목사로부터 섬김을 받고 황제가 된 기분이 들어 너무 좋다”고 입을 모았다.

안 목사는 말년까지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오늘 한국교회의 부족한 점은 봉사와 나눔의 실천이 아니겠느냐”며 “섬김으로 사회를 바로 인도할 예언자적 지도력이 필요하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신앙인의 양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안 목사의 빈소는 광주광역시 국빈장례문화원 201호에 마련되었으며, 입관예식은 5월 8일 오후 6시에 진행되었다. 장례예식은 5월 9일 오전 8시 광주월광교회당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거행되었으며, 장지는 전남 함평군 신광면 가덕마을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백경옥 여사와 아들 안길준·안봉준 장로, 사위 주철현 목사 등 2남 1녀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고인의 평생 헌신과 공로를 기려 총회장(總會葬)으로 장례를 엄수함으로써 한국교회 목회자의 귀감이 되어온 안영로 목사의 삶을 추모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90회 총회장을 지낸 안영로 목사가 지난 5월 6일 오전 9시 30분경 광주광역시 자택에서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평생을 한국 개신교의 부흥과 교단 화합, 그리고 세계 선교를 위해 바친 고인의 장례는 예장통합 총회장(總會葬)으로 엄수됐다. 빈소는 광주 국빈장례문화원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5월 9일 오전 광주월광교회에서 교계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깊은 애도 속에 천국환송예식으로 거행됐다. 고인은 장례 일정을 마친 후 고향인 전남 함평군 신광면 가덕리 선영에 안장됐다.

193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안 목사는 호남신학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하워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972년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는 광주 유덕교회 담임목사와 광주 수피아여자고등학교 교목실장을 거쳤으며, 1990년 광주서남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18년 동안 교회를 이끌었다.

안 목사는 구한말 선교사들에게 받은 영적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 의식을 바탕으로 ‘오직 예수 세계 선교’라는 목회 표어를 평생 실천했다. 부임 당시 장년 출석 500여 명 수준이던 광주서남교회를 장년과 교회학교를 포함해 출석 2,000여 명 규모의 호남 지역 대표 교회로 성장시켰다. 특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던 고인은 분쟁이 있던 지역 교회들의 임시 당회장을 도맡아 교회를 정상화하는 치유 선교 사역에 탁월한 발자취를 남겼다.

교단과 교계 연합을 위한 헌신도 눈부셨다. 2005년에는 예장통합 제90회 총회장으로 선출돼 교단 내 화합과 성장을 주도했다. 이와 함께 한국기독공보 이사장, 월드미션신문 이사장, CTS기독교TV 공동대표회장, 세계농촌선교센터 대표 등을 역임하며 기독교 언론 발전과 농촌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사학수호국민운동본부 본부장, 기독교애국운동 대표회장, 한국기도운동본부 상임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사회 안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안 목사는 ‘주님을 섬기는 머슴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정성을 다하자’는 좌우명을 성경책에 적어두고 평생을 겸손하게 살았다. 원로목사로 은퇴한 후에도 자신이 시무했던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교단 헌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끝까지 교회에 짐이 되지 않겠다는 고인의 평소 소신은 마지막 장례 예식 장소 결정을 통해서도 실천되며 한국 교계에 아름다운 뒷모습과 깊은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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